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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호 소설 <도바 위에 뜬 별>
제2회 - 3. 국제시장을 떠나다

손병호 소설 <도바 위에 뜬 별>
제2회 - 3. 국제시장을 떠나다

창원일보 | 입력 : 2026/05/06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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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 1959년 함안 출생
◆도매상의 재고떨이 수작



지루한 봄장마, 아스팔트 바닥이 녹아내리는 뜨거운 여름이 국제시장 도바 위를 느리게 지나갔다. 추석이 지나자 국제시장의 분위기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졌다.



반팔 와이셔츠는 진작부터 찾는 사람이 없었고, 셔츠 도바 앞에서 멈춰 서는 손님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가을 상품을 일찌감치 취급했어야 했는데 신 부장과 연락이 잘 되지 않았다. 그는 9월 초순까지 춘추용 남방을 공급해 주겠다고 큰소리쳤으나 그 후로 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하도 답답해 신 부장이 일하는 도매상 사장을 직접 찾아갔다. 사장은 마흔 초반의 대구 사람으로 노점 도매 3년 만에 수억을 벌었다는 수완가였다. 그가 나를 보자마자 난색을 하며 변명조로 말했다.



"와 이카노, 우리도 가만있은 거 아이데이. 동대문이랑 성남시를 다 뒤져도 물건이 안 나오더라 카이. 돈을 싸 들고 가가 현금 박치기 하자 해도, 올해는 레다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카이. 신 부장 캉 일주일을 꼬박 돌아다니다가 내 먼저 내려왔는 기라"



상대가 힘들다고 미리 징징대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물건을 못 구하면 그들 역시 장사를 못 하게 되니 타격이 클 것이다. 하지만 당장은 하루 매출에 그날의 생계가 달려 있는 나 같은 노점상들이 더 힘들기 마련이었다.



도매 사장은 내 눈치를 살피면서 물건 사입이 힘든 이유를 구구하게 설명했다.



"올해는 겨울이 빨리 닥친다 안 카능기요. 그랑께 가을은 짧다 카지. 그 예보 한마디에 의류공장들이 가을 상품들 생산을 통째로 멈춰버렸데이"



"그러면 사장님, 어떡해요? 조금만 일찍 귀띔해 주셨다면 저도 대책을 세웠을 텐데. 날씨가 쌀쌀하다고 손님들이 반팔은 거들떠도 안 보는데, 가을 장사를 이렇게 접으라는 말입니까?"



내가 따지듯 덤벼들다가 사정조로 말하자, 사장은 지금까지 말하던 거친 대구 사투리 대신 나긋나긋한 서울말로 어투를 바꾸었다. 신 부장과 함께 일하면서 서울말 하는 요령을 터득했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성호 씨.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우리도 몰랐어. 우리 도매상들도 가을 물건 팔아야 겨울 물건 뗄 수 있는데. 깨놓고 말하자면, 이 판에 어렵기는 노점들보다 우리가 더 힘들지. 미리 잡아놓은 도바도 놀릴 판인데, 자릿세가 장난 아니야"



설마 했는데 결국 일이 이 지경이 된 것은 내 불찰이었다. 악어 형님이 늦어도 8월 말까지 가을 상품을 준비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었다.



"성호야, 네가 지난봄에 팔기 힘든 재고 셔츠 수백 장을 쉽게 파는 것을 보고, 신 부장이 너를 이용하려고 머리를 굴릴 수도 있을 거다. 그러니 가을 상품은 각별히 신경 써야 해. 이 바닥은 어려울 땐 힘을 합치지만 평소엔 잔돈 몇 푼에도 안면을 싹 바꾸는 곳이야"



악어 형님은, 도매상에서 가을 레다 결정을 미룰 때는 사실 전년도 팔리지 않은 재고를 밀겠다는 속셈일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신 부장은 내가 다른 도매상과 접촉하지 못하게 확답을 주지 않으면서 시간만 끌었던 것이었다. 그렇다고 이 바닥을 소개해 주었으며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주었던 신 부장을 모른 체하고 다른 도매상들과 거래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더욱이 국제시장 노점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리는 내가 거래처를 바꾸게 되면 그가 몸담고 있는 도매상의 신뢰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다음 날 신 부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악어 형님이 예상했던 대로의 제안이 나왔다.



"성호 씨, 솔직히 말해 작년 재고이지만 가을 스웨터가 창고에 꽤 있어. 근데 문제 있는 물건들이 약간 섞여 있어요. 여름 장마 때 지하 창고 습기 때문에 냄새도 나고, 많이 눅눅한 상태야. 처음엔 팔기 힘들겠지만 사나흘 햇빛에 내놓으면 괜찮을 거야. 이 물건들만 처분해 주면 올겨울 물건들은 제일 좋은 것으로 밀어줄 테니 조금만 도와줘요"



신 부장은 내 눈치를 살피며 사정조로 부탁했다.



나는 신 부장의 부탁을 완곡하게 거절했다. 조악한 옷을 팔 수는 있어도 냄새나는 쓰레기를 팔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좁은 바닥에서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약간의 결단이 필요했다. 때로는 이웃의 요청에 불편한 외면이 필요했다. 생존이란 그런 것이었다.



◆쫓겨난 도바



은행나무 가로수 잎이 시시각각 짙은 노란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계절은 바야흐로 가을의 한가운데를 지나가고 있었다.


가로수 잎이 유난히 많이 떨어지는 10월 초순, 장사를 마칠 무렵 도바 앞에 낯선 사내 둘이 나타났다. 인상이 평범해 보이는 얼굴들이 아니었다. 일행 중 검은 선글라스를 낀 중년 남자가 도바 주변을 맴돌며 주위를 기웃거리다 내게 위압적으로 말했다.



"보소, 여기 이 자리 우리가 이달 초부터 장사하기로 자리 주인에게 임대했어요. 내일부터는 더 이상 장사 못합니다. 사정 봐드릴 테니 오늘까지만 장사 하시는 겁니다"



갑작스런 그들의 출현으로 어리둥절해하는 내게 선글라스 남자는 처음보다 약간 누그러진 어조로 전후 사정을 설명해 주었다. 내가 지금 사용하는 도바 자리를 자기네가 10월부터 장사하기로 신 부장 측과 이미 임대 계약이 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다음 날부터 그들이 바로 장사를 해야 하니 자리를 비워 달라는 통보였다.



황당했다. 아무리 노점이라지만 말 한마디 없이 자리를 빼앗기는 것이 이렇게 허무할 줄 몰랐다. 국제시장에서 버텨온 지난 몇 달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대팔이의 욕설로 시작된 첫날, 악어 형님이 손수 칠해준 합판, 손님들로 북새통을 이루던 저녁 장사. 그것들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신 부장에게 확인하니 그들의 주장은 사실이었다. 전직 은행원이자 신문기자였던 내가 이렇게 노점 장사를 오래 할 줄 몰랐다며 뒤늦게 궁색한 변명을 했다. 그는 빠른 시일 내로 내게 다른 자리를 알아봐 주겠노라고 입에 발린 말을 했지만 믿음이 가지 않았다.



역시 예상대로였다. 다음 날 내가 장사하던 자리에 그 남자들 대신 웬 아주머니가 묵은 냄새가 나는 재고품 셔츠를 팔고 있었다. 신 부장이 내게 권했던 바로 그 물건들이었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멈춰 서서 그 아주머니의 도바를 바라보았다. 냄새나는 재고를 팔라던 신 부장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내가 거절한 물건이 내 자리에서 팔리고 있었다. 묘한 기분이었다. 분하다기보다는 어딘가 씁쓸하고 허탈했다. 구 씨 형님은 그 장면을 보고 혀를 차며 말했다.



"봐라, 신 부장이라는 인간, 처음부터 다 계획이 있었던 기라. 성호 니가 거절하면 바로 저렇게 할 작정이었던 거야"



형님은 당분간 자기의 도바 자리를 비켜줄 테니 자릿세만 내고 장사하라고 했다. 나는 당분간 장사를 쉬고 싶다는 말로 형님의 호의를 거절했다. 우울한 낯빛으로 나누는 우리의 대화에 영숙 씨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성호 씨 자리 때문이라면 걱정 마세요. 내 친구 언니가 밀양 터미널 맞은편, 오일장 서는 곳에서 국밥집을 해요. 마침 식당 앞에 장사할 만한 자리가 하나 비었는데, 자릿세만 내면 장사해도 된다네요. 5일에 한 번이지만 큰 슈퍼 바로 옆이라 사람들 유동이 엄청 많다고 그래요. 언니 말로는 여자 청바지가 잘 팔릴 것 같다네요. 게다가 언니네 친정은 물론 시댁 친지들이 장날마다 식당으로 온다고 하니 그분들이 소문내면 단골은 걱정 안 해도 된다네요"



악어 형님이 영숙 씨의 말에 반색을 하며 내게 말했다.



"성호야. 밀양장이라면 이칠장인데 무안장이나 삼랑진장과는 비교가 안 된다. 사실 오일장 다니는 상인들 말로는 요즘 IMF 때문에 도시보다 차라리 농촌 경기가 더 낫다고 하더라. 시골장에 목이 좋으면 거기 하루 매출이 여기 사흘치 정도는 될 거다. 니 혼자 생활비는 안 벌어 쓰겠나? 이번 기회에 경험 삼아 시골 장판도 한 번 밟아봐라. 장사는 발품 아이가"



그날 저녁 왕비다방에 모인 우리는 평소보다 말이 없었다. 대팔이는 연신 담배를 피워댔고, 구 씨 형님은 빈 잔만 만지작거렸다. 영숙 씨가 내온 커피가 식도록 아무도 손을 대지 않았다. 먼저 말을 꺼낸 건 대팔이었다.



"성호야, 니 진짜 가는 기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팔이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담배 연기만 길게 내뿜었다. 악어 형님이 천천히 커피잔을 들며 말했다.



"잘 되면 그기서 자리 잡아도 되고, 안 되면 언제든 다시 와라. 이 자리가 어디 가는 것도 아이고"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많은 것이 담겨 있었다.



영숙 씨와 형님의 적극적인 권유로 나는 장사 근거지를 국제시장에서 밀양으로 옮기게 되었다. 식당 주인이자 영숙 씨 친구 언니라는 사람과 전화상으로 구두 계약을 했다. 매달 한 달치 자릿세를 선불로 내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여자 주인은 "지금 밀양에는 여자 청바지가 유행이다"고 영숙 씨의 말을 뒷받침해 주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청바지 노점상 이 사장의 소개로 부산 평화시장에서 청바지를 떼고 밀양장으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물건은 원가가 비싼 대신 컬러 색상도 괜찮았고 미싱 바느질도 꼼꼼했다. 원가가 조금 비싸더라도 물건의 품질이 좋아야 했다. 물건 품질에 확신이 있다면 비록 비싸더라도 팔 자신이 있었다. 물건에 자신이 없으면 당가를 칠 때 목소리가 세게 나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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