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호 소설 <도바 위에 뜬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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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 1959년 함안 출생 |
밀양에서 첫 장사를 시작하기 전날이었다. 임대료 계산도 있고 여주인과 미리 안면을 터놓아야 장사에 도움이 될 것 같아 하루 숙박을 예정하고 늦은 오후 밀양으로 출발했다. 고속도로가 개설되지 않아 부산에서 김해를 거쳐 삼랑진, 평촌을 지나 국도로 얼추 두 시간 가까이 걸리는 길이었다.
계절은 시월 중순, 가을이 한껏 깊어가고 있었다. 구포다리를 지나 낙동강을 건너자 강변의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며 은빛 물결을 만들었다. 차창 밖으로 스며드는 바람에는 싸늘한 기운과 함께 알 수 없는 서글픔이 묻어 있었다. 수확을 끝낸 빈 들판은 만추의 쓸쓸한 서정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농부 몇이 멀찍이 서서 볏단을 묶고 있었고, 그 곁에 세워둔 시동 꺼지지 않은 경운기만 주인을 기다리며 괜스레 화난 사람처럼 부르릉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추일의 서정은 분명 평화로워 보였지만, 그 풍경 속을 달리는 내 마음은 편치 않았다. 불과 몇 달 남짓한 노점 경력. 장사라고 해봤자 국제시장 골목 한편에서 셔츠 몇 벌 늘어놓고 팔아 본 초라한 경험뿐이었다. 그나마도 자리 문제로 쫓겨나듯 짐을 빼야 했던 참이었다. 그런 내가 이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밀양으로 장사를 떠나는 길이었다. 핸들을 잡은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기대가 없었다면 거짓말이었다. 처음 가는 장터에서 혹시 운 좋게 좋은 자리를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반면에 그만큼 불안도 컸다. 또다시 낯선 장소, 모르는 장꾼들 틈에 끼어 물건을 펼쳐놓는다는 게 얼마나 어색하고 초라할까. 벌써부터 짐작이 갔다.
◆동대와의 이별
오래전 내가 좋아해 자주 암송하곤 했던 당나라 시인 고적(高適)의 《별동대(別董大)》라는 이별 시가 저절로 입가에 맴돌았다. 고적이 그의 벗 동대와 작별하며 지은 시였다.
천리 황운에 해는 희미해지고/ 북풍은 기러기를 몰아 눈발은 흩날리네 /앞길에 알아주는 이 없을까 근심 마라/ 천하에 그대를 모를 이 누가 있겠는가
고시의 구절들은 먼 옛 벗이 보내는 위로처럼 내 마음을 감싸주었다. 불안감이 어느 정도 가시자 알 수 없는 기다림 같은 것이 마음 저편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새로운 고장에서 마주할 얼굴들, 미지의 인연들, 그리고 그 속에서 잠시 지친 인생을 쉬고 갈 안정된 도바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도.
김해 생림면을 지나 낙동강변까지 작은 평야가 펼쳐지자 멀리 삼랑진 철교가 보였다. 그 위로 비치는 시월의 햇살은 이미 빠르게 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방금 달려온 길, 김해에서 삼랑진 철교로 이어지는 곧은 외길을 드라이브하는 것을 좋아했다. 삼랑진은 태백 황지에서 발원한 낙동강이 안동과 남지, 함안, 창녕을 거쳐 드넓은 남해 바다로 흘러들기 직전, 여름 녹조를 가라앉히고 잠시 숨을 고른 듯 맑은 가을 물빛을 드러내는 곳이다. 그녀는 태백산맥에서 갈라져 나온 소백산맥의 지선들이 남으로 남으로 달리다가 이윽고 강의 맑은 빛에 이끌려 조용히 무릎을 꿇은 듯 멈춰 선, 산과 강이 만나는 삼랑진 강변길을 좋아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굳이 서김해 톨게이트에서 고속도로를 버리고 이 좁고 구불구불한 2차선 국도로 핸들을 꺾었다. 아마도 무의식 속에 그녀와의 추억을 따라가고 싶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삼랑진에서 평촌을 거쳐 밀양으로 들어서려 했는데, 이미 떠난 사랑과의 추억에 젖다 보니 차는 어느새 삼랑진중고등학교를 옆으로 하고 만어산을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잘못 든 길이라는 걸 알아차렸지만 이미 되돌리기엔 너무 깊숙이 들어온 뒤였다. 어차피 길은 단장면의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거쳐 밀양시내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정해진 길이란 없었다. 지금까지 내 인생이 그러했다.
자동차가 만어사 길과 단장면으로 갈라지는 삼거리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풍경이 달라져 있었다. 고지대 천수답 다랭이 논은 벌써 추수를 마치고 빈 들판만 남아 있었다. 잘려 나간 볏단 자리마다 검은 흙이 드러나 있어 더욱 쓸쓸해 보였다.
자동차는 막 감물리 고개를 넘어 저수지 방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평일 늦은 오후라 교행하는 차가 없어 운전에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퀴즈 프로를 건성으로 듣고 있었다.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액셀러레이터에서 오른발을 떼고 급히 브레이크를 밟았다. 끼익, 하며 차가 작은 신음소리를 내었다. 그 순간 가을 산길의 고요가 단숨에 깨졌다. 차체가 짧게 흔들리며 멈췄다.
쪽빛 가을 코트를 걸친, 중키의 삼십 대 초반쯤으로 보이는 여자. 그 여자가 내 차를 향해 부지런히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인적 없는 저녁, 내리막 고갯길에서 그 몸짓은 유난히 또렷하게 부각되었다.
멀리서 볼 때는 제법 큰 키로 보였는데, 옆에서 보니 평범한 키였다. 하지만 인상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야무지게 다문 입매와 약간 각이 진 하관이 그 인상을 더욱 단단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
조수석 창문을 내리자 그녀는 자동차에 몸을 바짝 붙여 마치 금방이라도 차 문을 열고 타기라도 할 사람처럼 다급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혹시 지금 밀양으로 들어가시는 길인가요?"
"예, 시내로 들어가긴 합니다만"
나는 그녀가 내 차를 멈춘 사정을 궁금해하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녀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스쳤다.
"마침 잘 되었네요. 제 차가 갑자기 고장이 났거든요. 긴급출동을 불렀는데 오늘 출동 요청이 많아 언제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군요. 저도 목적지가 밀양 시내인데 가까운 택시 정류소까지만이라도 태워주실 수 있을까요?"
"예. 타시죠"
그녀가 뒷자리를 살피다가 짐이 많은 것을 알고 내 옆 조수석 자리에 앉았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은 모습, 단정히 빗어내린 짧은 컷 단발머리, 화장기 거의 없는 담백한 얼굴이었다.
그녀가 다시 뒷좌석을 흘끗 보고 말을 꺼냈다.
"짐이 참 많으시네요"
"떠돌이 노점상입니다. 내일 밀양장에 처음 장사 나가 봅니다"
"아… 그래요"
노점상을 한다는 내 말에 그녀는 별 관심 없는 듯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 안에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나는 줄여놓았던 라디오 음량을 조금 전 크기로 높였다.
퀴즈 프로그램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낭랑한 목소리의 여자 아나운서가 차 안의 침묵을 적당하게 메워 주고 있었다. 별로 어렵지 않은 문제를 출연자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맞추고 있었다.
"다음은 약간의 난이도가 있는 문학 문제입니다. `프라하`를 배경으로 활동한 《변신》을 쓴 실존주의 작가입니다. 직업은 보험회사 사원이었고, 작품 경향은 부조리와 소외를 주로 다루었습니다. 이 작가는 누구일까요?"
전화로 연결된 출연자가 우물거리다 틀린 답을 계속 내놓았다. 스튜디오에서 웃음소리가 흘렀다. 나는 무심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카프카… 일반 사람들에겐 낯선 이름이지"
낮게 중얼거리는 혼잣말을 들었는지 그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약간 의아하다는 투로 말했다.
"저도 카프카 작품을 읽은 적이 있는데 내용이 어렵더군요"
"저 역시 전에는 그랬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조금 달리 읽힙니다. 성에 들어가려 애써도 번번이 막히는 주인공 K의 모습이… 꼭 제가 걷는 길 같아서요"
그녀는 내 말에 고개만 끄덕일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표정이 조금 우울해 보였다.
그때는 몰랐다. 그녀가 어머니 기일을 맞아 만어사에서 불공을 드리고 오는 길이었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훗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