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병호 소설 <도바 위에 뜬 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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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 1959년 함안 출생 |
◆염주팔찌를 낀 여인
라디오의 퀴즈 프로그램이 끝났다. 그때부터 가을 분위기에 어울리는 조용한 음악이 계속 흘러나왔다. 표충사 방향으로 자동차를 직진하다가 울산에서 영남알프스를 가로질러 넘어오는 24번 국도로 길을 갈아탔다. 도로는 시원하게 일직선으로 뚫려 있었다. 차는 밀양 시내 방면으로 서서히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외람된 말씀이지만, 노점상 하시는 분이 카프카를 아시다니 뜻밖이네요"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틀리지 않았다고 해서 기분 좋은 말도 아니었다. 창밖으로 가을 들판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노점상이라고 책을 못 읽을 이유는 없지요"
내 목소리가 의도보다 조금 차가웠다는 것을 말하고 나서야 알았다.
그녀도 그렇게 느꼈는지 잠깐 입을 다물었다. 차 안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그녀가 먼저 어색한 분위기를 걷어내려는 듯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아, 제가 실례를 했네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카프카 같은 실존주의 작가들에 대한 얘기를 나눌 사람이 요즘 주변에 없어서 반가웠던 거예요. 선생님, 실제로는 어떤 일을 하시나요? 설마 만행 중이신 건 아니죠?"
괜히 뻣뻣하게 굴었다 싶어 말투를 고쳤다.
"독서의 깊이가 직업이나 신분에 따라 정해지는 건 아니지요. 그냥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걸 좋아했어요. 뜻도 모르고 닥치는 대로 읽다가 고등학교 때 카프카에 꽂혔던 거죠. 뭐 청소년 때의 그 시절엔 괜한 지적 허세 같은 게 없었다고는 못 하겠지만요"
말끝에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쪽 분이야말로 프란츠 카프카를 읽으셨다니, 독서 수준이 대단하신 것 같습니다" 나의 과장 섞인 감탄에 여자가 별다른 반응 없이, 내 독서 이력을 떠보기라도 하듯 새로운 질문을 했다.
"선생님, 혹시 최인훈의 『광장』을 읽으신 적이 있나요?"
나는 그녀가 내민 질문에 바로 답하지 않았다. 그 소설 주인공 명준은 반공포로 심사 때 돌아갈 곳이 없었다. 남북으로 갈라진 조국. 그는 제3국 인도로 향하는 동지나해의 한 지점에서 푸른 심연을 향하여 사라져 버린다. 나 또한 삶의 한 지점에서 방향을 잃고 목적지가 없는 것은 소설의 주인공이나 다름없었다.
때마침 깜빡이도 켜지 않고 갑자기 차선을 침범해 오는 고급 승용차가 있었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라이트를 두세 번 작동시켰다.
"아, 오해하셨다면 정말 죄송해요. 그냥 궁금해서요. 『성』의 주인공 K와 『광장』의 이명준, 두 사람 다 현실 속의 인간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면 상징으로만 봐야 할까요? 제가 참여하는 문학모임에서 다음 달 주제가 `광장`이라서요"
그녀의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여전히 나를 시험하려는 은근한 도발이 섞여 있었다. 여자의 의도는 중요치 않았다. 오랜만에 문학 이야기를 나눌 즐거움을 회피할 필요가 없었다. 서산 너머로 막 넘어가는 저녁 햇살 한 줄기가 자동차 전면 유리창에 부딪혀 바스러지며 빠르게 흩어졌다. 차 안에는 엔진 소리만 일정하게 이어지고, 여자의 향수 냄새가 희미하게 코끝에 감돌았다.
"K는 끝내 자기 자리를 못 찾은 사람 아닙니까. 들어가려는데 계속 막히고, 설명도 안 해주고. 왜 안 되는지도 모르고요"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계속 했다.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런 때가 있잖아요. 문은 있는데 못 들어가는 때"
그녀가 팔짱을 끼며 내 말에 공감 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선생님은 K와 이명준 중 어느 쪽이 더 공감이 가세요?"
뜻밖에도 꽤 구체적인 질문이었다.
"저는 K 쪽입니다. 이명준은 그래도 선택을 했잖아요. 남도 북도 아닌 제3의 길을 택했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 의지가 있었다는 거니까요. K는 선택조차 허락받지 못한 사람이죠. 문 앞에 평생 서 있다가 끝나버린 사람" "그게 더 비극적으로 느껴지지 않으세요?" "비극이라기보다는… 더 솔직하다고 느껴집니다. 우리 대부분은 이명준처럼 극적인 선택을 하는 게 아니라, K처럼 그냥 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하루가 가고 해가 지나가고 끝나잖아요"
그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창밖으로 어두워지는 들판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선생님, 전에는 무슨 일 하셨어요? 노점상만 하시지 않은 것 같아서요" 사람을 읽는 눈이 있는 여자였다.
"몇 가지 해봤습니다" "어떤 일이요?" "딱히 말씀드릴 만한 일들은 아니고요" 그녀가 피식 웃었다.
"그것도 카프카식 대답이네요. K처럼 자기 정체를 끝까지 안 밝히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녀와 대화 중에 처음으로 가볍게 웃은 순간이었다.
"그렇게 들리셨다면 할 말이 없네요"
"소설 주인공들을 굳이 비교하자면 K는 세상 바깥에서 길을 잃었고, 이명준은 마음 안에서 길을 잃었겠죠"
그녀가 그 말을 되새기듯 잠시 창밖을 바라봤다.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자 차가 다시 미끄러졌다. 이윽고 그녀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선생님, 그렇게 길을 잃은 사람들에게 출구 같은 게 있을까요? 실존주의자들은 고독과 소외를 인간의 조건이라고 하잖아요. 거기서 벗어나는 길이 있기는 한 건지요"
나는 그녀의 손목에 감긴 염주 팔찌와 무릎 위에 놓인 봉투를 힐끗 보았다. `만어사`라는 글씨 아래로 달마도 불화 한 폭이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 "굳이 제게 물으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 댁에서 이미 실천하고 계신 게 해답인 것 같습니다. 고독을 피하려고 산사로 가는 길. 그게 일종의 탈출일 수도 있겠죠"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살짝 웃었다. "그럼 종교가 해방이 아니라 도피라고 생각하세요?"
나는 잠시 창밖을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근데 사람은 가끔 그런 데라도 안 가면 버티기가 힘들 때가 있잖습니까"
그녀가 잠시 손목에 차고 있는 염주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맞는 말이기도 하고 틀린 말이기도 하네요. 저는 답을 찾으러 가는 게 아니라 그냥 조용히 있고 싶어서 가거든요. 아무것도 해결이 안 되더라도 잠깐 멈출 수 있는 곳이 필요할 때가 있잖아요"
"그렇다면 종교가 도피인지 해방인지는 중요하지 않겠네요. 멈추는 것 자체가 때로는 가장 용기 있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그녀가 운전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탐색하는 눈빛은 이제 아니었다.
"선생님은 노점상하시는 분 치고는 말씀을 너무 잘하시는 것 같아요"
"글쎄요. 말을 잘하기 보다는 노점에서 오랜시간 당가 치다 보면 말이 늘긴 합니다" "당가요, 그게 무슨 뜻인데요?" "아! 죄송합니다. 그 말은 장사치가 손님 불러 모으는 말입니다. 이 바닥 용어지요"
그녀가 웃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편안한 웃음이었다.
"그것도 일종의 언어 아닐까요. 카프카가 체코어가 아닌 독일어로 글을 쓴 것처럼, 자기 세계에 맞는 언어를 찾는 거요"
뜻밖의 비유였다. 나는 그녀를 다시 바라보았다.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저도 미처 생각 못 한 관점이네요."
그녀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되물었다.
"그럼 고독과 소외를 벗어날 수 있는 현실적인 해법은 뭐가 될까요?"
"그게 어렵죠. 하지만 굳이 말하자면… 로맨스 아닐까요"
나는 적당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아 우스갯소리로 받았지만 그녀는 진지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로맨스요?" "고독에는 고독으로 맞서지 말아야죠. 사람 때문에 생긴 일은 사람으로 풀어야 하거든요"
여자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내 말 속에 농담이 섞였다는 것을 알고서 입술 끝에 쓴웃음을 띠었다. 그리고는 장난스레 물었다.
"선생님은 그런 사랑, 해보셨어요?"
나는 전방을 바라보며 짐짓 무뚝뚝하게 받았다.
"노점상 하다 보면 그런 거… 멀리하게 됩니다"
"그럼 그것이 선생님 고독의 이유도 될 수 있겠네요"
여자가 말끝을 흐렸다.
잠시 침묵 끝에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비슷한 것 같아요. 로맨스 같은 건 한동안 생각도 안 했거든요.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기보다는… 그냥 그런 것들이 얼마 전부터 부질없고 다 멀게 느껴져서요"
뜻밖의 고백이었다. 나는 그녀의 갑작스런 신상에 관한 말에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짧은 말이 차 안의 분위기를 다시 한 번 바꾸어놓았다.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그녀가 먼저 내게 물었다.
"저는 한성호라고 합니다. 집은 부산, 밀양장 뜨내기 상인이지요"
"저도 부산이에요. 이수연이라고 해요. 한 선생님, 밀양에 자주 오실 건가요?"
"특별한 일이 없다면 오일장이 서는 날마다 오게 되겠지요. 스트리트 브랜드는 입지 않으실테지만 혹시 청바지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들러주십시오. 터미널 건너편 노점입니다"
"스트리트 브랜드? 호호 처음 듣는 브랜드네요. 밀양에 살지는 않지만 오늘 신세도 갚을 겸 언제 한 번 들를게요"
멀리 밀양강을 낀 강변도로 쪽 가로등들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했다. 방송국 채널이 바뀌었는지 차 안에는 라디오 잡음만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