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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호 소설 <도바 위에 뜬 별>
제4회 - 1. 청바지 사건

손병호 소설 <도바 위에 뜬 별>
제4회 - 1. 청바지 사건

창원일보 | 입력 : 2026/06/03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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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 1959년 함안 출생    

◆검댕 묻은 청바지

 

1999년 1월, 해가 바뀌자 장사판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IMF가 몰고 온 불황의 칼바람이 도시를 지나 농촌 구석까지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신 부장이 그동안 대형 도매상을 등에 업고 노점상들에게 물건을 대주었지만, 매출이 뚝 끊기자 다들 신용으로 땡겨 간 외상값을 갚을 길이 없었다.

 

결국 도매상들이 최후통첩을 보냈다. 밀린 외상 일부를 탕감해 줄 테니 봄이 올 때까지 물건 출고를 전면 중단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다른 도매상들도 약속이나 한 듯 줄줄이 문을 닫았다. 소식이 퍼지자 장사판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물건이 돌아야 장사를 할 텐데 줄이 끊겼으니, 그야말로 손발이 꽁꽁 묶인 꼴이었다.

 

나 역시 신 부장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봄까지 휴업한다는 짤막한 통보였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그날, 입술에 문 담배마저 쓰디썼다.

 

악어 형님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왔다.

 

"아우야, 오늘 별일 없으면 저녁에 왕비다방으로 좀 와라"

 

반갑게 전화를 받으면서도 가슴 한구석이 덜컹 내려앉았다. 형님의 목소리가 평소와 다르게 무거웠다. 오후 장사를 서둘러 접고 승용차는 밀양에 둔 채 기차에 올랐다. 차창 너머로 스쳐 가는 겨울 들판은 잿빛으로 굳어 있었고, 내 마음도 까닭 없이 무거워져 갔다.

 

다방 문을 열고 들어서자 카운터에 앉아 있는 영숙 씨와 먼저 눈이 마주쳤다.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반가운 마음에 눈인사를 건넸지만, 다방 안을 감도는 묘한 긴장감 탓에 나도 모르게 다시 표정이 굳어졌다. 영숙 씨 역시 평소 같이 환대하는말과 인사 대신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묵묵히 쳐다보았다.

 

맨 안쪽 자리에 있던 악어 형님이 나를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구 씨 형님과 대팔이도 와 있었다.

 

커피가 나오기도 전에 악어 형님이 심각한 얼굴로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우야, 밀양 장사하느라 고생 많았지? 사실 오늘 아우의 머리를 좀 빌리려고 만나자고 했다"

 

형님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구 씨 형님이 가방에서 청바지 한 장을 꺼내 탁자 위에 촤르륵 펼쳤다. 물이 예쁘게 빠진 여자 청바지였다. 아래로 갈수록 밑단이 나팔꽃처럼 살짝 퍼지는 요즘 유행 스타일이었다. 한눈에 봐도 시장 바닥 물건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원단 질이 고급스러웠다. 

 

"와, 물건 정말 좋네요. 근데 노점에서 풀기엔 단가가 꽤 세 보이는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구 씨 형님이 평소와 달리 흥분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성호야, 도매상들이 3월 초까지 물건 끊는다는 소리 들었제? 여기 노점상들 전부 목줄이 타들어 갔다. 근데 내가 잘 아는 성남 의류 공장 전무 놈한테 얼마 전에 연락이 온 기라. 원단 값 결제할 돈이 급하다 카면서, 여자 청바지 사천 장을 공장 원가 반값에 넘기겠다 안 카나. 처음 보내온 샘플이 바로 이거다"

 

구 씨 형님의 말을 대팔이가 거들고 나섰다.

 

"성호야, 생각해 봐라. 지금 노점상들 다들 물건 떨어져서 도바 다이 비우고 놀고 있다. 이 정도 때깔이면 물건 풀자마자 동이 난다. 신용 있는 애들한테 절반만 뿌려도 본전은 빼고 남을거고. 그래서 악어 형님이 선금 삼십 프로 쏴 주고 물건을 땡겨 받은 거 아이가"

 

그제야 꽉 막혔던 내 가슴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이 판국에도 솟아날 구멍은 있구나` 싶었다.

 

"잘됐네요. 저도 요즘 레다가 다 떨어져 고민이었는데, 이 정도 품질이면 불황이라도 무조건 터집니다. 원가 절반이면 대박이죠"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팔이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가방에서 똑같은 청바지 한 장을 더 꺼내 내 앞에 툭 던졌다.

 

"근데 말이다… 성호야, 니 눈으로 함 봐라. 이걸 어찌 팔겠노"

 

대팔이가 새로 꺼낸 바지 밑단에는 시커먼 얼룩이 가득했다. 자세히 보니 불에 탄 그을음 자국이었다.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악어 형님이 깊은 한숨을 뱉으며 말을 받았다.

 

"성남 물건 창고 옆 화공약품 공장에서 큰불이 났단다. 그 매연이 박스 안으로 죄다 스며들어서 바지 밑단이 이 모양 이 꼴이 된 거지. 구 씨를 작정하고 속인 거다. 구 씨가 순진해서 당한 게 아니다. 다들 장사판이 막히니까 뭐라도 뚫어보려다 이 지경이 된 거지. 누구 원망할 것도 없다"

 

악어 형님의 말이 끝나자, 구 씨 형님이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수그렸다. 자신을 탓하지 않고 감싸주는 악어 형님의 넉넉한 말 한마디가 오히려 송곳처럼 가슴을 찌르는 모양이었다. 구 씨 형님은 차마 악어 형님의 눈을 마주치지 못한 채,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탁자만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미안함과 자책감으로 일그러진 입술이 무언가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 들썩였지만, 결국 아무런 말도 뱉지 못하고 마른침만 삼켜댔다.

 

결국 악어 형님의 언성이 높아졌다. 화를 내는 게 아니었다. 소개해준 잘못 밖에 없는 구씨형님이 자기 탓인 양 면목 없어 하는 꼴을 보기가 안타깝고 속상해 지르는 고함이었다. 

 

"박스를 뜯어봤더니 열에 아홉은 밑바닥에 시꺼먼 검댕이가 묻었더라. 돈 받아 처먹은 전무는 튀었고, 공장 사장이라는 놈은 잔금을 마저 부치든가 물건을 도로 보내라며 배를 째라네. 장당 오천원씩, 선금 육백만원이 고마 날아갔다. 성호야, 이거 법으로 돈 돌려받을 방법이 있겠냐?"

 

"형님, 법으로 걸 수야 있겠지만, 저 쪽에서 미리 짜고 한 일 같은데 전무 개인 횡령으로 꼬리 자르기 하면 돈 받기 힘들겁니다"

 

나는 탁자 위에 놓인 청바지를 바라보았다. 고급스러운 원단 위에 검은 검댕 자국이 선명했다. 그것은 단순한 얼룩이 아니라, 노점상들의 척박한 삶에 드리운 짙은 그을음 같았다.

 

탁자 위에 놓인 청바지를 모두가 멍하니 보고 있었다. 본다고 굳이 대책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바지 밑단의 그을음을 물티슈로 닦아 보았다. 시커먼 얼룩 자국이 더 많이 옆으로 번졌다.  손끝에 시커먼 가루가 묻어날 때마다, 사람들의 표정은 더 어두워져 갔다. 

 

"성호야, 이거 싸게라도 풀면 팔릴 거라 생각했지마는… 본전은 커녕, 팔면 팔수록 남는 게 없겠더라. 고마, 불에 확 태워버리는 게 속 시원하겠건마는 돈이 걸려 있으니…"

 

대팔이가 악어 형님의 침통한 안색을 살피며 말꼬리를 흐렸다.

 

악어 형님은 말없이 굳은살 박인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작은 얼룩 하나 때문에 제 가치를 잃어버린 청바지 꼴이 처량했다. 형님의 눈빛엔 아쉬움과 분노, 체념이 뒤섞여 있었다.

 

나는 검댕 묻은 바지를 살펴보다가 조심스럽게 접어 가방에 넣었다. 시선이 일제히 나에게 쏠렸다.

 

"이대로는 답이 없습니다. 싸게 풀어도 남는 게 없고, 버리자니 나간 돈이 너무 큽니다"

 

구 씨 형님이 맥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뭔 수가 있겠노. 니한테 무슨 묘안이라도 있나?"

 

"솔직히 지금 당장은 답이 없습니다. 하지만 여기 앉아만 있다고 뭔 수가 나오겠습니까. 일단 길을 찾아봐야지요. 내일 점심때 다시 모이지요. 어떻게든 대책을 만들어 보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왕비다방 건물을 나서는 순간, 영도다리 쪽에서 불어온 찬바람이 뺨을 때렸다. 바람 끝에 비릿한 바다 내음과 폐선박의 찌든 기름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내일까지 묘수를 찾겠다고 큰소리는 쳤지만, 실은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형님의 처지를 생각하면 어떻게든 돕고 싶었으나 현실은 냉혹했다. 기껏해야 밑단을 잘라 여름용 반바지로 밀어내는 게 고작이었다. 수선비가 얹히면 본전이나 건질까, 이문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지금 형님 곁의 노점상들이 나처럼 팔 물건도 없이 멍하니 앉아 있다는 것. 그들의 하루 벌이가 오롯이 이 검댕 묻은 청바지에 묶여 있다는 사실이 내 어깨를 무겁게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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