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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훈 김해벨라에세이 회원 |
부엌 바닥을 나뒹굴던 엄마, 그 처절한 오열 속에 팽개쳐진 백설기의 하얀 김들이 아른거리던 그 겨울밤을 잊지 못한다.
들꽃처럼 피어나는 백설기 향 속에 파묻혀 이대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아득함이 목구멍을 막아버린 밤, 동생이 죽었고, 그 후 엄마는 사라졌다.
울어야 했지만 웃어야 했고, 불우했지만 행복하다 했고, 엄마는 없었지만, 아버지는 있었다. 다만 철이 없었을 뿐이었다.
한 번은 동무들이 나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나를 손가락질하며 엄마 없음을 비웃었고, 엄마도 없는데 웃고 다니는 나의 멍청함을 욕했다.
나는 소리쳤다. "우리 엄마 집 나갔다. 어찌할 거냐고, 너희가 엄마 없는 내 슬픔을 알긴 아느냐고" 왈칵 서러움이 쏟아졌다. `엄마 없는 하늘 아래`라는 영화의 주인공처럼 우쭐했지만 동무들은 나쁜 새끼들이었다.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나는 머리를 잘라야 했다. 눈 내리는 신작로를 지나 들어선 삼거리 이발소, 이발사 아저씨의 사각거리는 가위질은 평화로웠고 철제 난로 위의 주전자 주둥이에서는 힘겨운 시간들이 밀려 올라와 가래를 끓어내고 있었다.
거울을 마주한 저만치 반대편 선반에는 텔레비전이 얹혀져 있었으며 텔레비전 속에서는 혜은이가 리사이틀을 하고 있었다.
반짝이는 금빛 드레스, 그리스 신화의 미소년 처럼 앞머리가 살짝 말아 올려진 숏 커트, 깊은 눈망울은 안개를 품은 이슬처럼 탁하고 맑았다고나 할까, 그녀는 예쁘고 아름다웠다.
색소폰 선율에 걸려서 파르르 떨리던 청아한 구슬이 아롱거리는 듯한 목소리, 진심을 담아 어깨를 들썩이는 절제된 흐느낌, 당신은 모른다며 뜨거운 눈물로 아픈 마음을 깨끗이 씻어준다는 순정을 거울 속에서 흘리고 있었다.
아아, 나는 집 나간 엄마가 보고 싶었고, 동생의 흉 진 손등이 움켜쥐고 싶었고, 부엌을 나뒹굴던 백설기 냄새가 그리워졌다. 눈시울이 발개졌다. 차마 거울을 못 보겠다. 고개를 숙였다. 엄마….
한 거울 속에 내가 있고, 혜은이도 있었다. 존재한다. 존재한다는 것은 충만으로 시작되고 충만은 내 속이 나 아닌 다른 것으로 실재한다는 것이다.
발목까지 덮인 흰 천 위에 머리카락이 성에처럼 맺혀진다. 뚝뚝, 먹먹한 가슴에서 떨어지는 아련한 상념들이 흰 천을 검게 물들이고 있었다.
혜은이도 울고, 나도 울었다.
눈 덮인 신작로에서 식어버린 불우한 눈물들아/ 불꽃처럼 한 번에 피어지는 나의 페르소나야/ 네 자궁 속에서 깨끗이 부서지던 숱한 몽정들/ 오오, 노래를 불러다오/ 어미보다 더 붉은 순정의 자장가를.
엄마가 없어도 괜찮다는 스스로의 위로 속에서 누군가가 나를 위해 울어 줄 수 있다는 사실(이것은 믿음이었다)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혜은이가 엄마보다 더 좋았다. 그리고 슬펐다.
이발소를 나서자마자 내달리던 그 신작로의 각기 다른 처마 밑 고드름들은 녹는 게 아니라 우는 거였으며, 하늘에서 내리는 건 눈이 아니라 말라버린 눈물이 흐른다는 것 알게 됐다.
올겨울, 이곳 남쪽에는 눈이 오지 않았다.